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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은 시어머니 나오미 앞에서 호언장담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막상 베들레헴에 들어서니 시어머니의 태도가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고 마라가 부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을 징벌했다고 하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였다고 합니다. 모압에서 살았던 시간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몹시 낙담해 있는 상황입니다. 자기 슬픔에 너무 빠지다 보니 곁에 룻이 있다는 사실 조차 다 잊어버린 듯합니다.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었다”(룻1:6)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들어온 것인데 막상, 베들레헴에 오니 살길이 막막했던지 하는 말마다 낙심이 묻어 있는 말들만 합니다. 모압의 삶의 자리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돌아온 지금은 다시 새롭게 사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시어머니를 보면 더 낯선 땅에 있는 룻은 더욱 당황스럽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오히려 이 낯선 땅에서 새 길을 열어가는 사람으로 룻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너무 먼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인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는데 집중하는 것을 봅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때가 “보리 추수 시작 때”(룻1:22)였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 룻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 이삭을 줍겠나이다”(2)라고 나오미에게 말하며 밭으로 갑니다. 나오미가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라”고 했던 분위기를 전환시켜버립니다. 룻의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태도가 삶의 지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이 나오미라 부르던 말던 마라라 부르던 말던, 중요한 것은 오늘 먹을 거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어 먹지 않으려면 노동을 해서 먹어야 하는데 나오미나 자신이나 과부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는일이라는 것입니다. 손 놓고 있는 나오미를 비판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말입니다. 어느 밭에 가야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여자 혼자 밭에 간다는 것이 어떤 위험인지 모릅니다. 모르는 상황과 여건 속으로 룻은 들어갑니다. 어떻게 이렇게 담백하게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다시 나오미를 따를 때 룻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룻1:16) 믿음은 어찌 될지 모르는 모호함이라는 옥토에서 자랍니다. 우리는 어떤 여건과 형편을 내가 통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호함이 대부분입니다. 확실보다는 불확실이 더 많은 우리의 삶이지요. 그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가 일하던 곳이 알고 보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입니다. (3) ‘우연히’라고 말하고 마침(4) 보아스가 밭에 옵니다. ‘우연히’일 수 있는 것도, “마침” 보아스가 그 밭에 이른 것도 시작은 룻이 가만히 있앗던 것이 아니라 룻이 집을 나서는 순간에 맞닥뜨린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무기력하게 어떻게 하지 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 보려는 애씀이 마침내 새롭게 나의 하루를 빚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의 하루가 모헙이 됩니다. 나오미가 부르지 말라고 마라라 부르라더 나오미와 대조적입니다. 룻은 자기의 오늘이라는 여러 불완전한 조건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함으로 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납니다.
길어가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일을 보아스의 입으로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룻에 대해서 이런 저런 정보를 사환으로부터 들은 보아스는 룻에게 말합니다. 7개의 명령을 사환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내립니다. 1)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8), 2)여기서 떠나지 말라(8), 3)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8), 4)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9) 5)그들을 따르라(9), 6)내가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9), 목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마시라(9) 얼마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시입니까? 막연한 환대가 아니라 분명한 확신과 안전을 보장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환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함으로써 룻을 정서적으로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룻이나 일꾼들이나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밭의 주인인 보아스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유대 공동체 안에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은 삶의 여건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를 통해 한 순간에 보아스라는 유력자를 통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는 길을 열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려진 길, 다 만들어진 길을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갈 때가 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길이 있어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곧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내 딸아 갈지어다”(2) 나오미의 말을 평범하게 지나가면 안됩니다. 나오미는 왜 룻과 함께 나가지 못했을까? 추수 때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 일은 고아와 객과 과부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는 사실을 누가 알까요 룻입니까 나오미입니까 나오미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나오미는 나서지 못한 것일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주님의 말씀에서 제일 먼저 나은 것이 <나는 길이요> 입니다. 모호할 때, 하나님과 함께 나서면 거기가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야 진리라는 사실은 경험하게 되고 그 길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룻에게 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로 가니 보아스의 밭을 만나고 그 길에서 엘리멜렉 가문의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그 길에서 보아스를 통해 가장 불안한 삶의 처지에서 가장 안전한 삶의 여건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은 자신의 오늘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고백하는 룻의 용기가 만들어낸 삶의 이야기입니다.
|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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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 | 9월 21일(월) 새벽기도회 / 찬214장 / 막14:53-72 | 이병권 부목사 | 2026-09-21 | 2 |
| 1884 | 9월 18일(금) 새벽기도회 / 찬432장 / 막14:43-52 | 관리자 | 2026-09-18 | 10 |
| 1883 | 9월 17일(목) 새벽기도회 / 찬388장 / 막14:32-42 | 이병권 부목사 | 2026-09-17 | 11 |
| 1882 | 9월 16일(수) 새벽기도회 / 찬397장 / 막14:22-31 | 이병권 부목사 | 2026-09-16 | 10 |
| 1881 | 태릉교회 라이프 플러스 교회 | 김유현 위임목사 | 2026-09-15 | 11 |
| 1880 | 총회주일헌금 전달 | 김유현 위임목사 | 2026-09-15 | 11 |
| 1879 | 2026년 중추절 목회서신 | 김유현 위임목사 | 2026-09-15 | 11 |
| 1878 | 9월 15일(화) 새벽기도회 / 찬217장 / 막14:12-21 | 이병권 부목사 | 2026-09-15 | 9 |
| 1877 | 9월 14일(월) 새벽기도회 / 찬420장 / 막14:1-9 | 이병권 부목사 | 2026-09-14 | 22 |
| 1876 | 9월 11일(금) 새벽기도회 / 찬378장 / 막13:24-37 | 이병권 부목사 | 2026-09-11 | 20 |
| 1875 | 9월 10일(목) 새벽기도회 / 찬239장 / 막13:14-23 | 이병권 부목사 | 2026-09-10 | 22 |
| 1874 | 2026.9.9룻기강해(4)/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룻2:1-9) | 김유현 위임목사 | 2026-09-09 | 22 |
| 1873 | 9월 9일(수) 새벽기도회 / 찬532장 / 막13:5-13 | 이병권 부목사 | 2026-09-09 | 22 |
| 1872 | 9월 8일(화) 새벽기도회 / 찬300장 / 막13:1-4 | 이병권 부목사 | 2026-09-08 | 21 |
| 1871 | 9월 7일(월) 새벽기도회 / 찬542장 / 막12:38-44 | 이병권 부목사 | 2026-09-07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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